이순신 유적

전남 해남. 명량대첩 기념공원.

백산(栢山) 2014. 8. 22. 10:50

 

고뇌에 잠긴 이순신 장군상.

 

전남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저로 12.

 

 

명량해전을 앞두고 많은 왜구와 상대하여 빈약한 전투력으로 전투를 벌리려니 어찌 고뇌에 잠기지 않았겠는가?

 

지난 8월 10일에 우수영을 들려 충무사와 우수영성내를 둘러보다 보니 이곳 국민관광지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경으로 입장하기에 어중간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섰다가 오늘 8월 15일 광복절에 아내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온 동생과 외손자 남매와 다시 들렸다.

 

외손자 남매도 이제 중학생으로 지난 주말에 영화 <명량>을 가족동반으로 관람하였기에 이곳을 들린다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어 굳이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잠시 명량대첩 기념공원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자료는 기념공원 입장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명량대첩 기념공원.

 

명량해협(울독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 폭 300m여의 좁은 해협으로 만조시 유속이 23km에 달하는 급류가 흐르는 곳이다. 1597년 9월 16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한 13척의 병선으로 명량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 서해로 북상하는 왜선 133척을 격파함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계기를 마련한 곳이다. 임진왜란최후의 교두보였던 이곳을 성역화하여 이충무공과 휘하 장병 및 지역 의병들의 구국충절을 민족혼의 상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명량대첩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명량대첩탑, 명량대첩의의비, 전시관, 전망대 등을 시설하였으며 명량대첩비(보물503호)와 강강술레(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썰물일 때에는 우뚝 솟은 돌이 완전히 보여 그림과 같으나 밀물일 때는 이순신 장군의 신발에 까지 물이 차오른다 한다.

 

 

이 동상은 바다 건너편 진도 녹진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인데 이 동상은 위엄과 패기에 찬 모습의 동상으로 시름에 잠긴 이순신 동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진도대교 아래로 세차게 흐르는 명량(울돌목) 회오리바다.

 

울돌목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13척의 병선으로 조류를 이용해 왜선 133척을 격퇴시킴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이룩한 곳으로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 전첩지이다. 


 

바다가 운다고 하여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3백여 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바다물이 곧게 흐르는 게 아니라 회오리처럼 빙빙 돌아 용트림을 하며 흐르며 물 흐름의 속도가 무척 빨라 국내에서는 유속이 제일 빠른 곳이다. 만약 이곳에 빠진다면 일류 수영선수도 헤어나기가 어렵겠다.

 

 

명량(울돌목)의 회오리바다 모습.

 

*울돌목의 유속(물살)
울돌목의 유속은 왜 빠를까요??


국립해양조사원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해안의 양쪽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이 빠른 급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한 지형조건의 울돌목은 병법적으로 보면 사지(死地)라고 한다. 이순신장군은 이런 울돌목의 사지를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해 1597년 9월16일 명량대첩이 있기 하루 전인 15일에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사지를 적의 등뒤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해서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조선수군과 이순신장군은 조선수군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신화를 창조한다.


울돌목의 소용돌이치는 급류를 보려면 바닷물이 들고나는 시간(물때)을 알아야 한다. 물때가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오후 2시 ~ 4시 사이에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의 급류를 볼 수 있다.

 

 

명량대첩탑.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대첩기념공원 내에 있는 명량대첩 탑은 지난 1990년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세워진 탑이다. 이 기념탑은 1597년 9월16일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휘하의 장병들과 지역 의병들이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여척을 격파한 세계 해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승첩(勝捷)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 탑의 조형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영령들을 기리는 높이17m, 넓이19.12m의 화강암으로 된 명량대첩 탑이 우뚝 솟아 충무공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싸우는 관병과 의병들의 모습을 군상 조각으로 배치했다.

 

 

회령포의 결의상.

 

명량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고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5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회령포의 결의에 대한 안내문.

 

회령포는 현재 장흥 회진을 말한다.

 

 

명량대첩 의의비(鳴梁大捷 意義碑)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의 건립 의의를 기록한 비이다.

 

 

명량대첩 의의비 안내문.

 

 

*이충무공 어록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충무공의 서한문 일절을 의재 허백련 선생이 쓰신 글로서 그 뜻은 “만약호남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나라와 겨레를 보존 하였으리오” 라는 내용입니다. (1593년에 난중일기 기록의, 사헌부지평 현덕승의 서한문) 명량대첩의 승리는 해상 의병의  눈부신 활약, 울돌목의 거센 물살, 이순신의 지혜가 삼위일체가 돼 이룬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남사람들을 비롯한 호남사람들의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비(碑)이다.

 

 

명량대첩 기념탑.

 

 

이순신 장군의 어록.

 

 

이순신 장군의 어록.

 

 

쇠사슬 감기틀.

 

 

쇠사슬 감기틀에 대한 설명문.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울돌목(명량)의 의병항쟁탑.

 

 

울돌목의 의병항쟁에 대한 설명문.

 

 

왜구가 우리 전함에 오르는 것을 농기구와 같은 무기로 대항하는 형상.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 고치는 형상의 탑.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12척 뿐이었습니다.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명량해전을 가능케 해준 정충량, 김세호 등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의 공을 기린 상입니다. 그래서 우수영에 폐선 1척을 수리해 보태어져 13척이 됐다고 한다.

 

 

폐선을 전함으로 고쳐 전쟁에 사용했다는 설명문.

 

 

수영정.

 

 

명량정.

 

수영정과 명량정은 쉼터로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우수영 성내 출입문.

 

 

전망탑에서 바라본 진도대교와 진도타워.

 

 

*2014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