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과 설화

김좌수(金座首) 딸과 궁한 만수(萬壽) 총각

백산(栢山) 2015. 8. 1. 09:44

 

 

 

김좌수(金座首) 딸과 궁한 만수(萬壽) 총각.

 

 

조선 중엽 무렵 황해도 지방에 만수(萬壽)라는 총각이 있었는데, 태생은 비록 양반이라 하지만 가세가 빈한한데다, 조실부모하여 글을 깨우치지 못하였겠다.

 

사정이 그러하니 언감생심 20살이 넘도록 장가들 엄두조차 낼 수 없어 그 나이가 되도록 부끄럽게도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머리를 칭칭 땋아 늘이고 다녀야만 했다.

 

다행히도 천생이 영리한 편이고 또한 부지런하므로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만은 잃지 않고 살았다. 그러한 만수에겐 유일한 소원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장가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엔 아무리 떵떵거리던 가문이었을 망정 지금의 만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지라 애지중지하던 고명딸을 선뜻 내주려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만수가 사는 동네에는 근동에서 재산이 많기로 소문난 김좌수(金座首)라 하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딸 하나가 있었다.

 

인물이 경국지색인데다 손끝이 야무진 것은 물론 몸가짐마저 조신하다는 소문이 근동에 자자한 통에 중매쟁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건만 웬만한 혼처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먼발치로 김좌수의 딸을 마음에 두었던 만수는 어느 날, 궁리 끝에 좋은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때는 해당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초여름인지라 농사일에 눈 코 뜰 사이가 없을 정도로 한창 바쁠 때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가드는 일이 급한 만수는 만사를 제쳐두고 김좌수 댁을 찾았다. 아흔 아홉 칸 대궐 같은 부잣집이라지만, 대개의 하인들은 농사일을 거들러 들에 나간 모양으로 집안은 한적하였다.

 

만수는 거침없이 사랑채를 지나 안대문 안으로 들어선 만수는 문제의 처녀가 거처하는 방 앞에 가서 동정을 살폈다. 그때 처녀는 한가롭게 수를 놓고 있었다.

 

만수는 대뜸 처녀의 방문을 활짝 열어제치고는 서슴없이 큰 소리로  "궁(宮)?"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문을 닫고서 뛰어나와 버렸다.

 

너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처녀는 어리둥절한 채로 소리조차 지를 염두가 없었다. 더군다나 '궁'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더욱 더 알 까닭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만수는 위아래 동네를 돌아다니며 해괴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내용인즉, "나는 우리 동네 김좌수 댁 따님과 '궁'했다." 는 것이었다.

 

소문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리는 물론하고 고을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여보게들, 만수가 김좌수 댁 따님과 '궁'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것도 모르겠나? 만수가 그 댁 따님을 건드렸단 말이지 뭔가."

 

"그게 사실일까?"

 

"만수가 무식하기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하며, 노총각에 노처녀이니 있을 법도 한 일이 아닌가."

 

"김좌수가 만수에게 딸을 줄까?"

 

"안 주면 별 수 있나?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도리 없지."

 

소문이란 아무리 천지에 진동을 하더라도 당사자는 맨 나중에야 알게되는 것이 이치라, 마침내 결국에 가서는 김좌수도 그 소문을 듣게 되었다.

 

넋이 나간 김좌수는 집으로 달려가 딸을 다그쳤다.

 

"그게 사실이냐?"

 

"소녀는 그런 짓을 저지른 일이 없사와요. 아버님"

 

눈물짓는 딸을 보고 김좌수는 귀여운 딸에 대한 몹쓸 누명을 벗기고자. 고을의 관가에 송사(訟事)를 걸게 되었다.

 

원고와 피고를 동헌 뜰 앞에 부복시킨 고을 수령이 한껏 위엄을 부리며 엄포를 놓았다.

 

"듣거라, 본관이 묻는 말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관명을 쫓지 않은 죄로 호된 벌을 면치 못하리라. 알겠느냐?"

 

"예---"

 

세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 만수에게 먼저 묻노니, 너는 아무 날 아무 시에 김좌수의 딸이 거처하는 방으로 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만수가 가로되, "그러한 사실이 있사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또가 눈을 부라리며, "궁이라 함은 김좌수의 딸과 관계를 맺었단 말이렸다?" 하고 물으니,

 

만수는 태연하게 "사또께서 통촉하옵소서." 하고 아뢰었다.

 

사또가 가로되, "다음 김좌수의 딸에게 묻노니, 만수가 모일모시 너의 방으로 와서 '궁'한 사실이 있느냐?"

 

좌수의 딸은 "네, 그런 사실은 있사옵니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딸의 대답이란 다만 만수가 다짜고짜로 자기 방문을 열고서 말로만 '궁'하고 달아나 버린 데 대한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과년한 처녀가 춘정을 못 이기어 총각 만수를 처녀의 방으로 불러들인 다음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해석할 소지가 있었다.

 

사또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자세한 내막을 지레짐작한 체 속전속결로 결혼의 영을 내리자. 김좌수도 더 이상 방치하면 동네망신이라 혼사를 서둘러 치렀다.

 

 

 

- 출처 / 고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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