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나주. 나주나씨. 삼강문(羅州羅氏. 三綱門)

백산(栢山) 2024. 2. 26. 05:00

나주나씨 삼강문(羅州羅氏 三綱門)
 
 
*주소: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265-6 (중대길 3)

 
 
나주에는 나주나씨 삼강문이 2군데가 있다.
하나 나주시내 남내동 15-1의 중앙로 변에 삼강문이 있고 또 하나반남면 대안리삼강문이 있다.

그러나, 정려 내용 대안리 삼강문과 나주시 남내동에 있는 삼강문 동일하다.

이곳에서는 반남면 대안리 중대마을에 있는 삼강문을 소개하려 한다.
 
삼강문의 집안인 나주나씨순소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명승지를 찾던 중 무안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암군 시종면 남해포정각을 짓고 이곳에 터를 잡아 중대마을이 소속된 대안리 일대에 자손들이 퍼져 살고 있다.
 
중대마을 입구에 단층으로 지어진 삼강문1816에 건립되었는데, 나주나씨2忠 2孝 4烈의 뜻을 기리고자 고을 유림들이 건립하게 되었다.
 
화려한 단청이 돋보이는 정려문에서 나주나씨 가문충신 2명, 효자 2명, 열녀 4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흔적을 볼 수 있다.

하늘색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가운데 문을 열고 정표가 새겨진 비석현판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 웹사이트 참조 -
 
 

중대마을 입구에 자리한 나주나씨 삼강문.
 
하늘색 철책으로 둘러있지만 열고
정려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나주나씨 삼강문.
 
 

나주나씨 삼강문 판액.
 
 

유 명국조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행 통훈대부 이성현감 효자 나공 사침지비
중조조 정표 숭정기원 후 을해 2월.
 
 
나사침이발의 아버지 이중호에게서 배웠다.
김응기(金應期),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이산(尼山) 현감 등을 역임했다.
 
정여립역모사건에 연류되어 아들과 함께 옥고를 치렸다.
선조는 효자 집안에 역신이 없다며 풀려나고 아들은 유배에 처한다.
 
 
삼강문유교의 핵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나온 말이다.
과거에 고귀하고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충신 통훈랑행 의금부도사 나덕명 지려
찬상공 제일자 순조 계해 정-
 
나덕명 나사침장남으로 소포이다.
기축옥사에 연류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국경인 등이 일본인 등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유배되어 풀려났다.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효자 나득소 지려.
찬성공지손 인조조정표
숭정기원 후
정미구월일 립.
 
나득소는 나사침의 손자이며 나덕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부친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했다.
그 효성으로 인조임금 때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효자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이성현감 나사침지려 중종경자 정-
 
나사침은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봉양하여 모친의 병을 회복시켰다.
1614년 임금의 명으로 삼강행실고가 증보될 때 수로되었다.
 
 

열녀 증 장사랑사옹원 참봉 나덕현 처 하동정씨 지려 -
 
하동정씨는 나사침의 넷째 아들 나덕현의 아내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선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권8, 양부투해(兩婦投海)에 따르면
"정씨는 나주사람이니 나덕현의 아내이다. 정유재란 때 시누이와 함께 왜적에게 사로잡혔다.
핍박받으며 배에 실리자 정씨는 통곡하였다.
 
곧 치마끈을 풀어 시누이 나씨와 함께 연결해 묶은 다음 함께 사로잡힌
나득호를 돌아보며 네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두부인의 일을 말해 달라"고
하며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충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훈련원사
행 정충장군 경기수군 랑도호사 겸 삼도총어사 교동도호부사
증 시충렬동 나덕헌 지려
찬성공제육자 숭정기원후 삼신축상지오년월 명정려-
 
나덕헌나사침의 여섯째 아들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분으로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을 갔는데 일본군과 마주쳤다.
일본군이 칼을 뽑아 죽이려 하자 나덕현은 어머니를 안고 슬피 울부짖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일본군이 비단에 '勿害孝子(효자를 헤치지 말라)' 라는
네 글자를 써주고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나덕현의 효심으로 본인과 어머니를 구한 것이었다.
외교적인 수완이 뛰어나 중국 심양을 세차례나 다녀왔다.
충렬의 시호를 받을 만큼 활약이 대단한 인물이다.
 
 

열부 선교랑 나수소 처, 의인 언양김씨지려.
찬성공지손부.
 
언양김씨나사침의 손자 나수소의 아내이다.
정묘호란 때 친가인 안주성에 피신해 있다가 성이 함락되자 분신자살했다.
그 열행(烈行)으로 인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열녀 의인 나씨지려.
찬성공지 손녀주부 광산김집 처
인묘조 정.
 
일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 열녀의 정려를 내렸다.
 
 
 
또, 한 명의 나주나씨나사침의 딸로 윤항이다.
정유재란 때 나덕현의 처 하동정씨와 함께 강물에 투신했다.
선조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윤항의 처 나씨 정려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덕헌(상),  언양김씨(중),  나주나씨(하) 지려.
 
 

나주나씨 삼강문 내부.
 
 

나주나씨 삼강문.
 
 
 
*다녀온 날: 2024년 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