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作心三日)의 유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각 고을로 발송할 문서가 있어서 역리(驛吏)에게 주었는데, 공문을 보낸 뒤 사흘 뒤에 그 공문의 내용을 고쳐야 했다. 그래서 발송한 공문을 회수하라고 지시했더니, 그 역리가 즉시 공문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아니, 공문을 어찌하여 네가 고스란히 가지고 있느냐? 삼일 전 이미 발송했어야 하지 않느냐?" 유성룡은 자신의 지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역리(驛吏)를 꾸짖으며 물었다.
그러자, 역리가 대답했다. "속담에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이란 말이 있어 소인의 소견으로 사흘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예상하였고 사흘을 기다리느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성룡은, "가히 세상을 깨우칠 말이다. 나의 잘못이다."라며 공문을 고친 뒤 반포했다.
'조선공사삼일'이란 속담은 본래 '고려공사삼일'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에 정치가 혼란하고 부정부패하여 관청의 행정명령이 자주 바뀌고 체계가 없는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조선공사삼일"이 되었다.
비단 정치가나 관청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의 성격이 처음에는 잘하다가 조금 지난 후에는 흐지부지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비롯되었다.
작심삼일은 마음을 단단히 먹기는 했지만 사흘만 지나면 그 결실이 흐지부지되고 만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사흘을 두고 생각한 끝에 비로소 결정을 본다는 신중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 고전 중에서 -
*위 사진은 온라인에서 빌려 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조선 선조 때의 재상(1542~1607). 의성 출생으로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인 그는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軍務)를 총괄하며, 이순신, 권율 등 명장(名將)을 등용하였다.
도학, 문장, 덕행, 서예로 이름을 떨친 문신 겸 학자인 동시에 바둑의 애호가이기도 했다.
@필독 사항@
*상기 본문과 관련 없는 “단순 인사성 비밀댓글”은
차단 및 삭제하겠습니다.*
'고전 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록으로 본 조선의 기인들 (신숙주, 이건창) (93) | 2024.12.10 |
---|---|
실록으로 본 조선의 기인들 (이율곡, 이우, 이경절) (142) | 2024.12.03 |
백일 떡에 담긴 의미들. (78) | 2024.11.19 |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82) | 2024.11.12 |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오불취(五不取(娶) (71) | 202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