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돌며

구, 목포 조선내화 터

백산(栢山) 2010. 4. 2. 12:20

 

구, 목포 조선내화 터 전경.

바다 건너 영암 삼호가 보이며 좌측 언덕 위에 서산 초등학교가 보인다.

 

조선내화는 90년대까지 목포의 주요 산업체로서 서산동과 온금동 주민을 비롯하여 목포 시민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던 산업체였다.

70년대 부터 경북 포항으로 이전하기 시작하며 목포의 작업량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광양에 새로히 공장을 세우며 목포 공장은 가동을 멈추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곳에서 생활의 터전을 삼았던 목포 근로자들에게는 타격이 컷으며 목포지역 경제에도 주름살을 잡히게 하였다고 볼 수있다. 특히, 온금동과 서산동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거나 조선내화에 근무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어선감축에 더불어 조선내화마저 가동을 멈추게 되었으니...

과거에는 서산 초등학교 학생수가 상당하였으나 요즘은 저출산 및 이주 주민들로 인하여 학생수가 급감하여 과거의 모습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고 한다.

 

조선내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맨 아래에 웹사이트에서 옮긴 글로 대신 하겠습니다.

 

조선내화 입구.

온금동 째보선창(다순구미) 방면에서 들어가는 길.

 

 

조선내화 사무실 입구.

 

 

조선내화 사무실.

조선내화(주) 목포공장 간판이 현재도 남아있다.

 

 

조선내화(주) 목포공장 간판.

 

 

                                                     조선내화의 웅장한 3개의 굴뚝.

   일제 강점기에서 광복 후 40년대말에 세워진 공장으로서 이 정도의 규모라면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조선내화 전경.

온금동 유달산 기슭에서 본 모습.

좌측 언덕 위에 서산초등학교가 보인다.

 

충무공원.

이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

정자와 벤치. 그리고 미끄럼틀, 그네도 설치되어있다.

 

충무공원.

규모는 작지만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고마운 장소일 것 같다.

 

글, 그림 / 봉구아재.

 

 

아래 글은 웹사이트에서 옮겨온 조선내화에 대한 상세한 내용입니다.

 

성옥 이훈동과 조선내화.

8ㆍ15 해방 이후 군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는 환수된 일본인 재산을 매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철광, 금광, 석탄 광산, 적산 가옥에 신경을 썼지만 납석 광산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눈도 돌리지 않았다기보다는 납석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기쁨을 안겨주고 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성산 광산을 청년 이훈동은 정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았다.


1946년 4월 20일 성산 광산을 손에 넣은 이훈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신백화점 박흥식 씨 소유의 완도 노화 광산까지 사들인 후 시간만 나면 내화연와의 원료가 되는 납석과 점토, 규조토 등을 찾기 위해 전국을 쏘다녔다.

점토는 바닷가 갯벌이 오래 순화된 것으로 흔히 찰흙이라 하며 공예품, 질그릇을 빚는 데 쓰기도 하고 백점토의 경우는 고급 도자기의 원료로 쓰인다. 점토의 상급품은 점력이 좋고 염분이 적어야 하며 모래가 섞이지 않아야 한다. 손으로 이겨 보면 점력을 알 수 있고, 한 점 떼어 혀로 맛을 보면 짠맛의 정도를 알게 되며, 어금니 사이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보면 모래의 크기와 함량의 정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조선내화공업주식회사는 1938년 7월 20일, 자본금 40만 엔으로 일본인 사토 등에 의해 목포시 온금동 122번지에 설립되었다. 몇 해 전까지 가동하던 조선내화 목포 공장 자리가 바로 그곳으로, 원료 및 제품 수송이 용이하게 선창과 맞닿은 곳에 자리 잡았다.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 침탈 과정의 일환으로 일본의 군수자본을 기반으로 설립된 조선내화공업주식회사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의 관재처로 넘어가 관리되다가 한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

 

1948년 당시 이훈동은 성산과 완도 광산에서 채광한 납석과 고령토, 점토 등을 조선내화에 납품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조선내화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광산 일을 제쳐 두고 조선내화에 매달렸는데 그만 6ㆍ25가 터지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수백 만 명이 죽고, 주요 산업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내화의 경우는 그 시설이 중공업에 필수적이며 또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 총 피해액이 무려 2억 원이 넘었다. 또 공장의 80퍼센트가 불에 타 한때 복구가 불가능하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는 전쟁 초기 불과 몇 달만의 일이었다.

 

손용기 대표이사가 찾아와 조선내화 인수를 권유했다. 여러 명이 운영하던, 그것도 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된 조선내화를 인수하는 것은 당시 이훈동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내화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회사를 인수했다.

1950년대가 거의 그러했지만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그저 공장 만들기에 모두 신들린 사람처럼 일에 미쳐 있는 모습이었다.

 

해가 다르게 조선내화는 달라져 갔다. 공장다운 면모를 갖추어 가고 53년 60톤급 1호 가마에서 54년에는 70톤급 2호 가마까지 운영하게 됐다. 55년에는 설비 복구 작업과 병행해 설비 증설도 시작했다.

 

공장 인수 6년 후인 50년대 말쯤에서야 조선내화는 연간 1만5천톤을 생산해냄으로써 전쟁 이전의 생산 능력을 회복하게 됐다.

전쟁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며 복구 또한 엄청난 자금과 피땀을 요구하는 것이다. 조선내화의 복구는 이처럼 이훈동의 30대 후반을 송두리째 삼키고서야 발전이 아닌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이 후 이훈동은 우리나라도 공업국이 될 것이라는 일념 하나로 강산이 2번이나 변하는 세월을 우직하게 내화연와에만 매달려 왔다.

"포항제철이 있고 조선내화 있었다."고 혹자는 말한다. 맞는 말이다. 포항제철이 있고 조선내화가 있기 위해서 나는 포항제철이 태어나기 스무 해 전부터 몸부림쳐 왔으니 남모를 고생인들 왜 없었겠는가?

 

조선내화의 연간 외형은 3,000억 원에 이른다. 외형 3,000억 원대의 회사는 어쩌면 셀 수도 없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이훈동에게 오늘의 조선내화가 오랜 세월 값진 정성으로 키워낸 기업이라 자랑스러운 것이리라.

- 출처: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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