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화순. 충의사(忠毅祠)

백산(栢山) 2016. 4. 14. 09:30

 

충의사(忠毅祠)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충의로 409 (백용리 423)  

 

 

충의사는 일반 사원이나 사당과 달리 토요일, 일요일과 법정 공휴일은 휴관하는 고로 일요일에 찾아간 필자는 겨우 옆 샛길로 들어가는 불법?을 자행하고 말았다. 그런 관계로 충의사에 모셔진 충의공 영정과 의암영당에 모셔진 논개부인 영정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절한 의병장 최경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최경회의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별호는 일휴당(日休堂), 본관은 해주이며 화순에서 출생했다.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무장현감, 영암군수, 담양부사 등을 지냈다. 1591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시묘하고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운 · 최경장 두 형과 아들 최홍기, 조카 최홍재 · 최홍우와 함께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았다. 전라우도 의병장이 된 그는 무주와 금산에서 적을 격퇴했다.

 

또 경상북도 개령지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성주성 탈환 때도 공을 세워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아홉 주야의 전투 끝에 진주성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진입해 들어올 때 조카 최홍우(큰형 최경운의 아들)를 탈출시키면서 조복(朝服)과 언월도를 고향에 보내고 김천일, 고종후 등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진주 창렬사, 능주 포충사, 화순의 삼충사에서 제향해 오다가 고종 임금 때 포충사와 삼충사는 철거되었고, 2003년 지역 주민들의 뜻을 모아 2003년에 사당 충의사를 준공했다.

 

 

- 백과사전 -

 

 

충의사 이용안내.

 

충의사는 일반 사원이나 사당과 달리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법정 공휴일은 휴관하므로 방문시 착오가 없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충의사 안내판.

 

 

충의사 안내문.

 

 

신도비.

 

 

최경회 장군 동상.

 

 

최경회 장군 난중 어록비.

 

 

홍살문.

 

 

동재(의병관)

 

 

서재.

 

 

충의사기실비(忠毅祠記實碑)

 

 

라문(全羅門)

 

 

충의사(사당)와 최경회 장군 사적비.

 

 

최경회 선생 사적비(좌)

 

 

최경회 부인 논개 의암영당.

 

의암 논개(論介)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 중국)이며 전북 장수군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때(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논개는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장수문.

 

 

의암영당 안내문.

 

 

최경회 부인 논개의 의암영당(義巖影堂)

 

1593년 진주성 함락으로 최경회가 자결하자,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12년) 당시 현감 정주석이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으며,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일휴당기념관.

 

 

진주문.

내삼문.

 

 

충의사.

 

 

탐방: 2016년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