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화순. 고사정(高士亭)

백산(栢山) 2016. 4. 15. 09:30

 

고사정(高士亭)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11.

 

 

최경운의 동생 최경장은 선조 임금이 세 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받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했다. 이에 선조 임금은 최경장의 장남 최홍우에게 남쪽 지방의 이름 높은 선비라는 뜻의 '남주고사(南州高士)'의 호를 내렸다. 강화부사를 지낸 최경장의 손자 최후헌이 '남주고사'의 호를 따서 정자를 세우면서 '고사정(高士亭)'이라 이름했다.

 

고사정에서 왼쪽으로 50미터 거리에 최경운 · 최경장 · 최경회 3형제의 생가 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고사정 앞에 의병청지 표지석이 서있다.

 

고사정 의병청 터.

 

최경운(崔慶雲, 1525~1597)은 양응정과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왜란을 맞았다.

 

최경운은 1592년 모친 평택 임씨의 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최경장(崔慶長, 1529~1601), 동생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아들 최홍재(崔弘載) · 최홍수(崔弘受), 조카 최홍우(崔弘宇) 등과 함께 화순 삼천리 고사정(高士亭)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병마와 군량미를 마련했다.

 

이때 그는 1차로 모은 의병을 장남 사헌부 지평 최홍재에게 주어 금산에 있는 고경명 장군 휘하로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금산에 도착하기 전에 고경명은 이미 전사(1592. 07. 09.)하여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최경운은 1592년 7월에 다시 이곳 의병청에서 2차로 의병을 모집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7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화순 오성산성에서 주민들과 집안 가솔 200명을 이끌고 일본군 3,000명과 3일간을 싸웠다. 마지막 날인 10월 17일 최경운은 차남 최홍수 및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참수 당했다.

 

정조 임금의 명에 의해 오성산 정상에 '진사 최경운 전망 유허비'가 세워졌다. 1789년(정조 13)에는 다산마을(다지리)에 삼충사(三忠祠)가 건립되어 최경운 · 최경장 · 최경회 3형제가 배향되었으나 1868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의병청지(義兵廳址)

의병청 터 표지석.

 

 

고사정(高士亭)

 

 

고사정 앞 노거수의 보호수 안내문.

 

현재 해주 최씨 고사정파 종손이 관리하고 있다.

 

 

탐방: 2016년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