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

백산(栢山) 2018. 9. 29. 09:00

 

녹동서원과 홍살문.

 

 

전남 영암군 영암읍 낭산로 10-41 (교동리 84-5)

 

 

녹동서원 전경.

 

 

녹동서원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위치한다.
원래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1630년(인조 8) 창건하여 연촌 최덕지를 봉안하는 사우였으나, 1665년(현종 7)에 최덕지의 손자인 최충성, 1695년(숙종 21)에 문곡 김수항, 1711년(숙종 37)에 농암 김창협을 추배하였다.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으며, 영당에 최덕지과 김수항의 영정을 동시에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7년에 복설되었다.

현재 많은 고문서류와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고문서로는 원생들의 명단을 적은『서원청금안』25책, 『서원서재유안』2책, 『심원록』5책, 『합경재보노안』3책 등을 비롯하여 통문, 완의, 노비기증문서 등의 낱장 문서가 있다. 또한 목판으로는 『연촌유사』, 『문곡집』, 『산당집』등 모셔진 인물들의 문집 목판과 인근지역의 인물의 『석천집』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녹동서원의 연혁, 조직과 운영, 경제기반, 유생들의 명단 등 종합적이고 다각적인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녹동서원 외삼문.

 

외삼문이 굳게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장 밖에서 몇 장 찰칵해야만 했다.

 

 

담장넘어로 살짝 보이는 녹동서원.

 

 

녹동서원 편액.

 

 

존경재.

 

 

존경재 현판.

 

 

녹동서원 묘정비.

 

 

 

 

녹동서원 관리사.

 

 

영암읍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세워진 녹동서원 통로석.

 

 


녹동서원 배향인물.

 

1) 주벽-최덕지(崔德之, 1384∼145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용봉(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인(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담(담)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환구단(환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2) 최충성(崔忠成, 1458∼1491)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필경(弼卿). 호는 산당서객(山堂書客). 광주(光州)에서 출생했다. 최덕지(崔德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용(司勇) 별(별)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 되어 ≪소학≫을 배웠으며 뒤에 정여창(鄭汝昌)의 제자가 되었다.

 

≪소학≫을 실천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문집 속에 <독소학문 讀小學文>·<독소학입교편문 讀小學立敎篇文>·<독소학명륜편문 讀小學明倫篇文>·<독소학경신편문 讀小學敬身篇文> 등 소학에 관한 저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천당지옥변 天堂地獄辨>을 지어 불교(佛敎)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전라감사로 부임했을 때 <상점필재선생서 上?畢齋先生書>·<상호남방백구약서 上湖南方伯求藥書>를 지어 자기추천을 간절하게 하기도 하였다. 김안국(金安國)·남효온(南孝溫)과는 동문(同門) 사이였다.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산당집≫ 5권이 있다.

 

 

3) 김수항(金壽恒, 1629∼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극효(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관(尙寬)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래(金래)의 딸이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尹拯)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 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 측에서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해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를 명에 의해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면서도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018.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