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유적지

전북 김제. 항일독립군 이종희 장군 생가.

백산(栢山) 2022. 12. 26. 05:00

항일독립군 이종희 장군 생가.

원평장터와 가까운 곳에 복원된 이종희 장군 생가.
실제 생가터는 여기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야 된다.


*주소: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225-1 (용호길 106)


독립운동가, 이종희(李鍾熙) 장군.

이종희 장군은 의열단장 김원봉과 함께 광복군 제1지대를 지휘한 독립 운동가이다.
일제(日帝)는 마지막까지도 그의 본명을 알지 못했는데, 이인홍, 이집중이라는 두 가지 가명(假名)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덕분에 독립 운동을 오랫동안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종희(1890.04.19-1946.03.28)에 관한 기록은 의열단으로부터 시작한다. 1924년 10월 의열단의 활동을 적은 일제 관헌의 기록물에는 이종희가 의열단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30살이 넘은 나이에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 1919년 만세시위운동의 영향으로 무장 투쟁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둘째,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설립된 이후, 국내에서 설렁탕 집을 가장한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이나 연통제 요원에 의한 스카우트였다.

어찌되었건 이종희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베이징에서 일제의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다. 김달하는 외교부 관리였으나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후, 중국으로 건너가 친일 관리의 부관이 되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독립 운동가들의 정보나 위치를 일본 경찰에 제공했다.

이회영, 유자명과 상의한 후, 의열단원들은 의열단의 이름으로 친일 밀정을 처단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 신문 ‘경보’(京報)에도 실렸는데, 김달하은 죽어 마땅한 자라고 표현했다. 당시 밀정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동지들은 당연한 결과라며, 일말의 동정도 표하지 않았다. 실제로 중국 경찰 당국도 살인범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중국에게도 일본은 적이었기 때문이다.

1925년에 의열단은 기존의 급진적 암살 파괴 운동에서 군사 정치 활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이종희 또한 황포 군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하여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하 생략함.


- 웹사이트 -

항일 독립투사 이종희 장군 안내판.

예향천리 마실길에 세워진 이종희 장군 안내판.

복원된 이종희 생가 중앙부분.

생가 우측부분.

생가 좌측부분.

생가 측면에서...

생가 뒤편에서...


아래는 원래 생가터 입니다.

본시 이종희 장군 생가터에는 현대식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주소는 용호길 60-20으로 되어있다.

생가터 벽에 이종희 장군 안내판이 붙어있다.

생가터 벽에 붙어있는 이종희 장군 안내문.



*다녀온 날: 2022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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