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나주. 수원백씨. 봉산서원(蓬山書院) 휴암 백인걸 제향

백산(栢山) 2023. 12. 27. 05:00

봉산서원 입구.
 
 
봉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 남평현감을 지낸 휴암 백인걸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822번 지방도로변에 봉산서원을 알리는 안내판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배향인물: 백인걸(白仁傑) : 수원백씨.
창건연도: 1590년(선조 23)
사액연도: 1667년(현종 8)
향 사 일: 음력 2월 15일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16 (지석로 212-8)
 
 

봉산서원 전경.
 
 

봉산서원은 1541년(중종 36)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후학을 양성하며 유풍(儒風)을 진작시켰던 휴암 백인걸(休庵 白仁傑)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백인걸의 학덕과 지척을 흠모해 오던 이 지역의 사림과 관리, 백성들은 힘을 합쳐 1590년(선조 23)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건립사실에 대하여는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書院可攷)≫에 도내 유림들의 건의로 건립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으나, 서봉령(徐鳳齡)이 1669년(현종 10)에 지은 ≪봉산서원실기≫에는 1650년(효종 1)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추측컨대 1590년에는 사당이, 1650년에는 강당이 추가되어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건물이 퇴락하자 1666년(현종 7) 봉산(蓬山) 밑 부자송(父子松), 휴암의 손자 효민(孝民)이 남평현감으로 부임해서 심었다는 소나무)이 있는 곳으로 이건 계획을 세웠다. 이때의 이건은 중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서봉령은 이때 서원의 부지를 세 번이나 바꾸고서야 묘우(廟宇)를 완성하였다고 ≪봉산서원실기≫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남평현감은 송시걸(宋時杰)이었는데 송시열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유생 최상호(崔尙虎)가 소두(疏頭)가 되어 청액상소를 올렸고, 예조판서 박세모(朴世模)가 회계(回啓)하고 우승지 송시철(宋時喆)이 사액을 재청하여 <蓬山 봉산>이라 사액받았다. 실제 사액은 이듬해인 1667년(현종 8)에 이루어졌고 예관으로는 예조정랑 이부(李부)가 파견되었다.
 
한편 송시열은 백인걸의 학덕을 흠모하여 그를 진유(眞儒)라 칭하였으며 청액소를 직접 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액이 내려지기까지 많은 후원을 하였고 사액 후에도 전라감사 홍처후(洪處厚)에게 봉산서원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사액된 이후 봉산서원의 사정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으나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1868년 훼철(1871년 훼철이라고도 함)되었다.
 
1972년 백종운의 주도로 신실만 복설되었다가 1984년 백주원 나주군수의 주력으로 수원백씨 문중에서 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1차 공사를 시작하였고 1994년 <휴암백인걸선생유적비>를 세웠다.
 
 
 
-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휴암 백인걸 선생 유적비.
 
 

서원 중건 위원회 명단비.
 
 

봉산서원의 유래.
 
 

봉산서원의 유래 안내문.
 
 

봉산서원 내삼문.
 
 
건물로는 1983년에 새로 중건한 사당과 내삼문만이 있을 뿐 강당과 기타 건물은 없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봉산서원 현판.
 
 

봉산사.
 
 

봉산사.
 
 

봉산서원 묘정비.
 
 

관리사.
 
 
 
*2023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