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의태자의 전설.
史記에 의하면 935년(신라의 제56대 경순왕 9년)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 세력에 눌려,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어 여러 신하와 함께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양도할 것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태자는 그의 동생 덕지왕자 (또는 덕주 공주) 및 이순유 등과 함께 불가함을 간언하였다.
태자가 말하길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王子曰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이후, 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금성(서라벌)을 떠나 금강산으로 가는 과정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고 한다.
태자가 이른 곳은 현재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석굴사원 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나라가 망하자 개골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중 동생 덕지왕자(또는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그의 동생 덕지왕자(또는 덕주공주)가 각각 조성한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터와 충청북도 제천 덕주사(德周寺)가 있다.
현재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절에 들려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한 약 1,000년 된 수령의 천연기념물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으며, 강원도 홍천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강원도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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