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해남. 우수영 거북배 터미널

백산(栢山) 2010. 5. 4. 15:45

 

우수영 거북배.

 

소재지 : 전남 해남군 문래면 우수영.

 

답사 : 2010년 5월 2일(일요일)

 

 

금호방조제를 출발하여 해남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북배를 감상하고 진도대교를 건너갈 예정이었으나, 선두차를 운전하던 기사?가 무심코 진도대교에 먼저 올라버려 하는 수없이 울돌목 거북배는 귀가 길에 들려 돌아보았기에 본란에 실린 사진들은 오후의 햇볕을 바라보는 역광에서 촬영한 것들이며, 필자의 촬영 솜씨가 미숙하여 화질이 좋지 않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진도 녹진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수영 거북배 터미널 모습.

이날 날씨는 대체로 쾌청하였으나, 원거리를 바라보는데는 운무가 끼어 시원스런 감이 떨어졌다.

 

 

거북배 선체 전경.

 

전남 해남군 우수영 울돌목 앞 바다에서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이 2008년 9월부터 운항되고 있다. 이 유람선은 선체의 길이는 49m, 선체의 폭이 10m, 368톤으로 3D 입체 영상관과 개폐식 전망대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승선 정원이 180명 정도라 한다.


 
대중교통.

해남버스터미널에서 우수영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
해남읍에서 약 33Km정도이며 버스 배차는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거북배 운항과 승선료.
해남 우수영 - 진도 녹진 - 진도 벽파까지 왕복하는데, 승선료는 1인당 15,000원.

 

우수영 관광지 관리사무소 (☏ 061-532-4088)

 

거북배와 일본배(안택선)의 뒷모습(좌측)

 

 

일본배(안택선:좌측)과 거북배(우측)

 

 

거북배에 승선하기 위한 통로.

 

 

거북배에 오르는 통로.

 

 

거북배 앞 부분과 일본배(안택선:좌측) 뒷부분.

 

 

거북배 앞부분.

 

 

일본배(안택선)

 

 

일본배(안택선) 뒷부분.

 

 

울돌목 거북배 우수영 터미널.

터미널 주변 경관을 들러보니 아직 제대로 완공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각종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관광단지로서 손색없는 곳이 되리라 기대하면서...

 

 

2009, 명량 대첩 축제 프랑카드.

 

 

2010년 행사 개요.
기 간 : 2010. 10. 8(금) ~ 10. 10일(일), 3일간.
장 소 : 전남 해남군 우수영관광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
주최/주관 : 전라남도·해남군·진도군, (재)명량대첩기념사업회.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해군.
행사 구성 : 메인행사, 기획행사, 부대행사 등

 

 

명량대첩 개요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정유년(1597년) 7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하여 거의 괴멸됨으로써 서해안으로 일본 수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함.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장흥 땅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여 후퇴하면서, 한편으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결전을 모색함.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수군 13척은 울돌목. 즉,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과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음.


- 12척 문헌기록 : 충무공 행록 (이분 지음)
- 13척 문헌기록 : 선조실록, 사대문궤
- 12척 혹은 13척 어느 것을 써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됨.

 

 


역사적 의의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었음.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까지 도달하게 되어 명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 승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함.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됨.

 

 


명량대첩의 배경.
선조 30년(1597년) 7월 7일에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에서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 척의 전선이 12척이 남게 되는 대참패를 겪음.


7월 23일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하여 수군의 재건을 맡김.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남방 330여km를 우회하여 부임하면서 병력과 군량 및 무기를 갖춤.


이 결과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영에 계류 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무장함.


※ 명량해전과 관련 사료마다 12척, 13척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모두가 틀린 것이 아님.
8월 19일 회령포에서 승선하여 명량 방향으로 후퇴하면서 4회에 걸쳐 왜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왜 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수립.
8월 29일 명량 입구에 위치한 벽파진에 주둔함.
9월 15일 벽파진에서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우수영으로 진을 옮김.
9월 16일 양도 앞 바다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명량 대첩을 거둠.

 

참고자료: http://www.mrdc.kr/

 

 

- 봉구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