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방

실록으로 본 조선의 기인들(송시열, 윤증)

백산(栢山) 2024. 12. 17. 05:00

 

웹사이트에서 빌려옴.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 이상 등장하는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 ~ 1689(숙종 15)

 

영보(英甫), 우암(尤庵), 우재(尤齋),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송시열 그는 선조 임금부터 숙종 임금 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 때이며 효종 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 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곬수 선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配享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던 장소에 송우암 수명유허비(宋尤庵 受命遺墟碑)

정읍시 수성동 671-2(우암로 54-1)와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고암서원(考巖書院)이 정읍시 모촌길 48-17 (하모동 378)에 자리하고 있다.

*본 블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윤증(尹拯, 1629~1714)

 

왕의 얼굴 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증(尹拯)

 

윤증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

어머니는 공주 이씨 장백(長白)의 딸이다.

 

윤증은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와 김집에게 배웠다.

스물아홉 살에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제자로 촉망을 받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 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 한 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 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 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 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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