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장성. 춘원 임종국 조림공적비

백산(栢山) 2010. 6. 14. 12:00

 

춘원 임종국 조림 공적비.

 

 

위치 :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축령산 중턱)

 

답사 : 2010년 6월 6일.

 

 

전북 고창군과 전남 장성군 경계에 자리한 축령산(621.6m) 일대에는 편백나무, 삼나무, 측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숲의 조성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조림가인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으로써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산에 1956년부터 21년 간 사비를 털어 가며 축령산에 편백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 덕분에 건너편 산자락에서 축령산을 바라다보면 거대한 초록 띠를 발견할 수 있는 명품 숲이 되었다.

 

40~50년을 자란 높이 20여 미터의 상록수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자라는 푸른 숲을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한다.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것은 물론, 가뭄으로 나무가 마르자, 온 가족이 함께 마을로부터 물지게를 지고 올라와 나무에 물을 주는 노력도 아끼지 않은 것. 울창한 숲을 걷다 만나는 그의 기념비 앞에 저절로 발길이 머무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2002년에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산림청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2005년 화장을 하여 축령산 중턱 느티나무 아래에 수목장으로 안장하였다.

 

휴양림 내에 산책로가 3개 코스로 조성되어있는데, 먼저 괴정마을(백련동)에서 시작해 삼거리 주차장~ 춘원 임종국 선생 기념비~ 헬기장~ 능선 갈림길~ 정상~ 임도~ 삼거리주차장~ 금곡마을로 내려오는 8.8㎞ 코스와 금곡마을에서 시작해 정상에서 해인사를 거쳐 괴정마을(백련동)로 내려오는 6.5㎞ 코스, 괴정마을에서 삼거리주차장~ 헬기장~ 우물터~ 모암 갈림길~ 통나무집~ 삼림욕장~ 우물터를 지나 다시 괴정마을로 돌아오는 5.5㎞ 코스다.

 

삼림욕은 빠르게 걷는 것보다 천천히 걸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해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숲을 만끽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백련동에서 춘원 임종국 조림공적비 가는 길.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약 2km정도의 거리에 있다.

 

 

축령산 안내도.

 

 

춘원 임종국 조림공적비.

 

 

이 공적비 건립은 1999년 2월로 되어있다.

 

 

공적비 뒷면.

 

 

춘원 임종국공 조림공적 비문.

 

여기 울창한 산림은 선각자 춘원 임종국공의 집념과 노력으로 이룩된 것이다. 옛부터 치산치수는 치국의 요체라 했는데, 우리 국토는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심하게 황폐되어 있었다.

 

공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오직 산을 푸르게 하는 것만이 나라를 되살리는 길이라 믿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평생을 바쳐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곳곳에 훌륭한 산림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인공조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국토녹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니,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조림왕으로 추앙 받고 있다.

 

공은 1915년 1월 19일 전라남도 순창군 복여면 조동에서 나주 임씨 영규공과 안동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25세 때인 1940년에 장성읍 장재마을로 이거 해왔다. 양잠과 특용작물재배로 소득을 올리다가, 광복 후 양묘업에 종사하면서 황폐일로의 임야를 걱정하던 중 1956년부터 조림에 착수하였다.

 

연차적으로 북일면 문암리 서삼면 모암리 북하면 월성리 등지의 임야 수100헥타를 매입하고 묘목을 양육하여 본격적으로 대단위조림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생계도 어려웠던 시대에 임업에 투자하는 것은 세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매년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묘목을 식재하고 수목가꾸기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한편 효율적 관리를 위해 보호원을 배치하고 임도를 개설하니 예상 밖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어 결국 전답과 주택까지 처분하고도 많은 채무를 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로 묘포장이 유실되는가하면 가뭄과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1968년 한발 때는 인부를 구할 수가 없어서 온 가족이 물지게를 지고 염천의 비탈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니 인근 주민들이 야간에 햇불을 들고 나와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경들을 수없이 겪었으나 날로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보람과 용기를 얻었으며 더욱이 조림목이 목재감으로 변해가자 임업도 경제성이 있음을 인식한 많은 산주들이 잇달아 조림에 착수하였다. 공은 이들에게 양질의 묘목을 공급하고 기술지도를 하여 조림의 선풍을 전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국토녹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이 공들여 가꾸어 놓은 이 산림은 식재율 관리상태 경제성 등이 모두 전국 제일로 평가되고 있으며, 한국산림정책의 성공사례로 지목되어 공무원 학생들에게 견습림으로 활용됨은 물론 호주 일본 독일 등지에서 시찰단이 방문하여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공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0년 철탑산업훈장 1972년 5·16민족상을 수여하였다.

 

춘원 임종국공은 1987년 7월 27일 향년 72세로 타계하였으며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나무들은 이제 모두 남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 숲에 와보면 누구나 공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공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군민은 공의 높은 뜻과 큰 공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장성문화원장 이병식 짓고 광주 이병현 쓰다.

 

이곳에서 금곡 영화마을까지는 4,2km이다.

 

 

편백 숲 조성에 관한 프랑카드.

 

 

공적비와 묘역.

 

 

공적비 권역 내에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