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유적 53

전남 해남.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명량대첩비 전경.   보물 제503호.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34-3 (동외리)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고, 1966년에는 사당(충무사)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 성역화를 위한 사업을 시작하여 매년 4월 28일 제향하고 있다.       해남 명량대첩비 안내문.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이다. 이곳은 옛 조선시대의 우수영(右水營)이며, 바로 앞이 진도를 바라보는 해남의 남쪽 끝 해안지역이다.일제강점기에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 다시 옮겨 세웠다. 이 석비는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꽂고, 그 위로 ..

이순신 유적 2016.10.29

전남 진도. 이충무공 전첩비(李忠武公 戰捷碑) 진도군 향토유형유산 제5호.

이충무공 전첩비(李忠武公 戰捷碑) 향토유형유산 제5호.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비신 높이 3.8m, 폭 1.2m, 두께 58㎝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이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비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새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

이순신 유적 2016.10.12

전남 진도. 벽파정(碧波亭) 진도향토유형유산 제8호.

복원된 벽파정 전경.  진도향토유형유산 제8호.20121년 2월 29일.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인 진도 벽파정이 복원됐다. 복원된 벽파정은 이충무공 전첩비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진도군에 따르면 고군면 벽파리에 벽파정 복원사업을 완료하고 마을 주민과 진도군 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들과 함께 지난 9월 26일 현판식과 더불어 준공식을 개최했다. 벽파정은 1207년(고려 희종3년)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창건해 1465년(조선 세조11년) 중건되었지만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었는데, 사업비 5억원을 투입, 고려시대 양식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벽파정의 역사를 고려해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또 벽파정 내부에는 벽파정을 주제로 한 시문을..

이순신 유적 2016.10.11

전남 보성. 열선루 터.

조선 수군 재건로 현황도. *주소: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809-3. 열선루(보성군청) 안내문. 1597년 8월 14일부터 16일 사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보성군청에 머무른다. 8월 15일 이순신은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가지고 온 선조 임금의 유지를 받는다. 보성군은 이순신의 장인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보성군수 방진과 이순신의 부인인 방씨가 살았던 곳이다.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받은 임금의 유지는 "조선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의지해서 싸우라" 는 퇴각명령이었다. 그것은 소수의 조선 수군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 폐지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이순신 유적 2016.03.22

전남 해남. 이충무공 영정과 명량대첩 비문 내용. 보물 제503호

이충무공 영정. - 2015. 05. 28. 현충사 이순신 기념관에서 -     명량대첩비문.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를 탁본하여 전시해두었다.   명량대첩비문 번역본(보물 제503호)   명량대첩비문 해설본(좌)과 원본(우)  *2014년 8월 15일(해남 우수영 유물전시관)   명량대첩 비문 내용(번역본) 만력25년(1597) 정유 9월에 통제사 이공이 해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 진을 치고 왜적들을 명량어귀에서 산산이 무찌르니 적들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여 감히 전라도를 엿보거나 경상도 충청도를 건드려 보지 못하다가 그 이듬해에 적이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세상사람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로는 공을 으뜸이라 하고 또 울도 싸움이 가장 신기 하였다고 이른다. 공이 일찍이 전라좌..

이순신 유적 2015.12.05